이 인구는 남한산성 안팍의 인구를 모두 고려한 수치이며, 산성 안쪽에만 국한시키면 600여 호 남짓한 규모였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남한산성 내에 존재했던 9개의 사찰 가운데 당시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현존하는 유일한 사찰이다.망월봉 남사면 중턱 해발 360m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산성내의 농업은 밭농사 위주로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건물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진남루, 칠성각, 대방, 요사채 등이 있는데, 그 가운데 대웅전이 가장 화려하게 지여진 고건축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남한산성은 청량산 능선을 따라 완만하게 이어지기 때문에 부담없이 걸을 수 있다.
통일 신라 시대의 주장성이 남한산성이라는 것은 이후 여러 고문헌에도 기록되고 있으며, 이후 연구에서 주장성과 남한산성의 크기를 비교하여 볼 때 당시 한산 지역 산성 중에서 이 기록에 근접한 산성은 남한산성이 유일하다는 것이 논거로 제시되고 있다.
이것은 성내동의 인구비율과 비교했을 때, 상당히 낮은 수치로서 산성내의 토지부양력이 그다지 높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남한산성의 최초 축성에 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조선 현종 13년(1672)에 부윤(府尹) 이세화(李世華)가 세운 건물로서 이 건물의 앞 뒤로는 세개의 연못이 있었으며 당시 고관(高官)들이 낚시를 즐기던 곳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