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규에 의하면 이 무렵 여운형은 장로교회선교사들이 세운 개신교 교회인 상동교회의 인사들을 만나 교제하면서 교회에 출석,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한다.
여운형은 1906년 양평군 양평읍 묘골에 개신교 교회를 세웠는데, 그 후 그의 문중 일족들에게 전도하여 잇달아 기독교인이 되게 하였다.
그를 수태했을 당시 조부 여규신이 꿈에 '태양이 떠오르는 꿈을 꾸고 낳았다.' 하여 여운형은 뒤에 아호를 몽양(夢陽)이라 했다고 한다.
여운형은 옥중에 심한 고문으로 1943년 7월에 집행유예를 받고 석방, 경성요양원에 입원 중 전향서를 썼다고 한다.
이후 여운형은 공공연히 송진우, 안재홍, 장택상과 함께 일본의 패망을 주장하였다.
[주 41] 1943년 7월 요양원에서 퇴원한 이후, 여운형은 일제 경찰에 의해 요주의 인물로 가택연금되고 감시당했다.
그러나, 약속은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사태는 원점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주 21]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여운형은 다음과 같이 통탄하였다.
여운형에게 미군정은 좌우합작을 위해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고, 미군정에 여운형은 상황에 따라 이용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이후 비상국민회의는 민주의원으로 바뀌었는데, 2월 14일 민주의원결성대회가 열렸으나 여운형은 김창숙, 함태영, 정인보, 조소앙 등과 함께 민주의원 의원직을 거부하였다.
박갑동에 의하면 신문 보도와는 달리, 미국의 자료에 의하면 여운형의 암살자는 김일성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대목 이 있다고 한다.
그 뒤 그의 조부는 동학에 입교하여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을 직접 만날 정도로 독실한 동학(천도교) 신도가 되었다 한다.
그러나 해방 당일 엔도 류사쿠 정무총감에게 치안권을 넘겨받은 여운형은 몹시 바빴다.
그 뒤 이 부분은 1919년 9월 11일에 발표된 통합 임시정부로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법 제7조가 되었다.
여운형은 1945년 광복 이후부터 정치 테러를 수 차례 겪었다.
[주 18] 1945년 10월초, 여운형은 미 군정 사령관 존 하지와 첫 대면이 이루어졌는데, 첫 대화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10일 아침 여운형은 김규식의 자택인 삼청장을 갈려는 찰나, 극좌세력에 의해 정치테러 당해 납치되어 이날 회의에 참석 못했다.
여운형은 허헌과 함께 임시정부의 법통성 주장은 옳지 않다는 시각을 피력하였다.
그러나, 1946년 5월에 김일성이 남한을 '미제국주의와 총독정치'라고 평가하며, 8월에는 '남한을 완전히 해방시켜야 한다.'는 연설을 했던 것을 여운형은 모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