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때문에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작업을 출판하는 것에 대한 흥미를 완전히 잃고 말았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그림 이론을 포함한 기존에 있었던 사물과 언어가 일치한다는 주장을 반대하였다.
1913년 비트겐슈타인은 노르웨이 송네 피요르드의 끝에 있는 스크욜덴 인근의 오지에서 독거에 들어갔다.
1918년 10월 비트겐슈타인은 이탈리아 전선에 복귀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탈리아군의 포로가 되었다.
영국군과의 전투 후에 비트겐슈타인은 "용감한 행동과 침착하고 냉정한 영웅적 활약"으로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 기간동안 비트겐슈타인은 일기에 종종 커크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적곤 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은 교직생활을 하면서 아이들을 위한 42쪽으로 된 철자와 발음이 표기된 사전을 만들었다.
이 무렵 비트겐슈타인은 수학기초론에 대한 자신의 기존 견해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영화관에 갈 때면 비트겐슈타인은 빵이나 파이 따위를 사들고 서는 영화를 보면서 먹었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편집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오히려 말할 수 없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고백했다.
전쟁 기간동안 비트겐슈타인은 군인의 눈으로 목격한 천박함에 대한 경멸을 노트에 기록하였다.
전쟁이 끝나고서도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노트에 철학과 종교에 대한 단상을 적어나갔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집을 짓는 일에 온통 매달렸고 창틀, 문, 난방기와 같은 것까지 일일이 살펴보았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일기장에 “한 문장에는 하나의 세계가 연습삼아 조립되어 있다”고 기록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