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 후 새로운 공화국의 임시대총통이었던 쑨원은 무엇보다도 평화적으로 청나라의 황제를 퇴위시키고 또한 중국의 통일이라는 대명제를 실현하기 위하여 스스로 그 자리를 위안스카이에게 양보하였다.
청조는 1898년 이래 철도부설권, 광산채굴권 등 막대한 이권을 외국인의 손에 넘겨주어 이 시기 철도 부설 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그 때문에 말레이 반도는 혁명 운동의 주요 활동 지역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상하이에 사람을 보내 쑹자오런, 황싱을 우창으로 오도록 하여 봉기 후 각 성과의 연락 계획을 수립하였으며, 추석인 10월 16일에 봉기하기로 날짜를 정했다.
그 가운데 1908년 10월에 일으킨 ‘안휘성 신군 봉기’와 1910년 2월에 일으킨 ‘경술 신군 봉기’, 그리고 1911년 4월에 일으킨 황화강 봉기등이 대표적인 사건인데, 이러한 무장봉기 실패들은 동맹회에 커다란 타격을 받기도 했다.
이 무렵 말레이 반도는 중국 본토를 제외하면 화교의 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이었으며, 화교의 경제적 위치도 크게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 13명의 각료 중 한족 출신은 4명뿐이고 나머지 9명은 만주족이었으며 그 9명 중 6명은 황족이었기 때문에 개혁의 기대를 완전히 저버린 내각인사였다.
1908년 이후, 혁명파의 혁명 운동은 군대 내의 신군(신건육군)의 혁명활동 동조자 포섭에 중점으로 옮겨, 혁명파 인사들은 신군 내에서 비밀리에 혁명 사상 보급에 노력했다.
이렇게 해서 성 밖에 있던 신군은 일제히 봉기하였으나 탄약의 부족과 성 안의 군대가 내응하지 않고 해군 또한 봉기에 반대했기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 날이 10월 10일이어서 오늘날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쌍십절이라 불러 기념하고 있다.
이후 6월 17일 ‘보로 동지회’가 조직되어 호북과 양광에서도 보로운동이 일어났는데, 그 가운데 제일 격렬하게 일어난 곳이 쓰촨 성이었다.
그러나 이 거사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간 후 망명길에 올랐고 영국 런던에서 청국공사관에 억류되었다.[주해 9] 쑨원은 이 사건으로 국제적으로 이름이 알려졌고 억류에서 풀려난 후에는 대영박물관에 드나들며 삼민주의 사상의 기초를 닦았다.
청조는 백성들의 원성을 사고있던 고관들을 파직하여 민심을 수습하는 한편, 혁명파를 진압하기 위해 2년 전에 축출한 위안스카이를 다시 부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쑨원은 여러 번에 걸쳐 말레이 반도를 방문해 현지의 화교들에게 혁명에 참가할 것을 호소했고, 다수의 화교들로부터 조언을 얻는 등 화교들로부터 혁명에 호응을 받았다.
